조부는 賁龜이고 妣는 載寧李氏, 沃川金氏이다. 부친은 道萬이고 妣는 聞韶金氏, 河濱李氏, 英陽南氏이다. 梧峯 申之悌는 선생에게 6대조가 되고 孤松 申弘望은 5대조가 된다.
신체인은 1731년(영조 7)에 義城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소질이 있어 주위를놀라게 했다. 향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합격했으며 1764년(영조 40)에 大山 李象靖의 문하에 입문했다. 신체인은 대산 문하에 입문하기 전에는 剛窩 任必大(1709~1773)에게배웠으며 후에는 九思堂 金樂行(1708~1766)에게 질의하면서 도학이 있음을 깨달았다. 1781년(정조 5)에이상정이 사망하자 신체인은 도학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동문들과 함께 학문에 더욱 힘썼다.
1782년(정조 6)에 錦淵精舍가 완성되자 왼쪽 방을 主敬齋, 오른쪽 방을 集義齋라이름 붙였다. 그는 세속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즐기고자 했으며 집안 살림이 어려워 어떤 때에는끼니도 잇기 어려웠지만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에 氷溪書院의 동주가 되었다. 신체인은 通講禮를 행하고자 하여주자의 月朔會約을 모방하여 의절까지 마련하였으나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만년에는 눈병으로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신체인은 눈을 감고 정좌하여 존양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1807년(순조 7)에고을 현감 金相任이 신체인의 경술과 문장이 일세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천거하였고, 연이어 方伯 尹光顔과鄭東觀이 각각 1808년과 1809년에 신체인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초3일에 세상을 버리니 그의 향년은 82세였다. 6월 24일 涑洞 坤坐에 안장되었다.
신체인은 韓愈를 특히 좋아했으며 천문지리‧병가‧산수‧복서‧의약 등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오로지 정주학에만 전념하였다. 성품이 간략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언행에 있어 준엄함이 있었다. 평생을가난하게 지냈지만 가난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崔數咎‧李宗洙‧金宗德‧柳長源‧趙述道 등과는도의결을 맺고 긴밀한 학문적 교유를 지켜 나갔다.
신체인의 학문은 主敬을 기본으로 하고, 靜坐를 요법으로 삼았으며, 整齊嚴肅과 正衣冠尊瞻視의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일찍이 敬을 논하는학설과 敬을 지키는 공부 방법이 모든 책에 서술되어 있으나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관계로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고 하여 嵩敬錄을저술하기도 했다.
卷1은 시 220수, 卷2∼5는 書 119편, 卷6은 잡저 10편, 권7은 序 9편, 記 12편, 卷8은 識跋 12편, 箴銘 4편, 상량문 4편, 卷9는 제문 21편, 묘표 2편, 卷10은 묘지명 12편, 묘갈명 3편, 비문 2편, 卷11은 행장 9편, 전(傳) 1편, 卷12는 부록인행장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후기 의성에 살던 처사학자인 신체인은 비록 전원에 은거했던 처사로서 안질에 걸려 고생을 했지만, 독실한 학자로서 방대한 분량의저술을 남겼다. 내용이 간단하지 않고 깊이가 있으며 분량도 많은 장문의 논설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저술을 검토해 볼 때, 당대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과교유하고 그들의 학문적 업적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書에는 한미한 시골 선비가 독서로 낙을 삼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누누이 그려져 있고 특히 저자가 평소 눈병으로인해 고생하는 사연이 자주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김종덕,유장원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심오한 학문적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깊이 있는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川沙 金宗德에게 보낸 편지가 매우 많다. 또 김종덕에게 보낸편지에는 『심경강록강보』의 간행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심경강록간보』에 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덕은 『심경강록간보』라고 하는 조선시대『심경』 관련 주석서 가운데 가장 방대한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거질의 문집을 남길만큼 당시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또 東巖 柳長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장원이 지은 『溪集考證』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계집고증』은 퇴계집에 대한 주해서로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김종덕, 유장원 등 당대의 영남좌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학자들과밀접한 교유를 나누고 있을 만큼 학문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書 가운데 특히 자질들에게 보낸 家書가 있는데, 그 중 居接에 참석하고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거접에 참여하고 있는 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있어서 당시 거접의분위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雜著 가운데 「天學宗旨圖辨」은 천주교에대한 비판서이다. 근자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에 기호지역의 총명한 인재들이 대거 중독되었다고 적고있다. 분량도 상당히 방대한 편이며, 저자의 서학비판에 관련된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中何嘗不在裏面辨」을 보면 저자가 상당히 성리설에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발하기이전과 이후의 상태에 관한 논쟁은 성리학에서도 매우 미묘한 부분인데, 저자는 상당히 치밀하게 장남헌과주자의 학설을 분석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與酉谷權丈(正鄰○庚戌)
酉谷에 사는 權正鄰에게 보낸 편지이다. 홍범구주에서 각각의 항목에 속하는 세부 항목에 대해서, 권정린이 이전에 저자에게 질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당시에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잘못 대답을 했다고 하면서, 수정된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했다.
與宗丈(龍起○乙酉)
家狀을 짓는 일은 문중의 큰 과제이니 저자가 구구한 식견으로 함부로 손댈 일은 아니지만, 문중의 장로들이 관여할 처지가 못 되고 종숙께서도 떠날 시간이 급하여 부득이 맡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遺事만 수록하려고 했으나 모두가 가장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부득이 짓게 되었지만, 유사와 기타 문자도 부록으로 수록해야 할 것이라 했다. 제목은 按廉使申公實蹟이라고 했다. 그 외 몇 가지 수정해야 할 사항을 말했다.
與宗兄(觀模○辛亥)
지난번 질의하신 아버지의 상중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 아들이 承重을 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경황 중에 잘못 대답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를 이어서 아들이 승중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지만, 變服의 상황이 아니라면 갑자기 승중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만약 조부의 小祥 전이라면 소상 때 승중을 하면 되고, 소상을 지낸 후라면 승중을 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예법에 대해 저자에게 질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答姜上舍(己丑)
진사 姜必勉에게 답한 편지이다. 북쪽으로 여행하고자 했던 계획은 결국 마가 끼어서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약속에도 운수가 있음을 알겠다고 했다. 보내준 시에 대해 품평하였다. 낚시하기 좋은 때가 되었다고 했다.